부재 지시대상

부재 지시대상absent referent은 여성과 동물에 대한 교차하는 억압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캐럴 J. 애덤스가 육식의 성정치에서 소개했다. 1978년, 마가렛 호만즈의 Bearing the Word를 읽다가 착안.

해설

동물은 고기의 지시대상이다. 즉, ‘고기’라는 단어는 ‘동물’을 지시하고, ‘동물’은 ‘고기’라는 단어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이다. 그런데 그냥 지시대상이 아니라 부재하는 지시대상이다. ‘고기’는 원래 살아있는 동물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동물을 죽여서 도축하고 그 존재를 없애야만 고기가 존재할 수 있다. 고기는 동물을 지시하지만 지시 대상인 동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은 고기의 부재 지시대상이다.

애덤스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을 부재 지시대상으로 만드는 방법은 세 가지다.

  1. 물리: 물리적으로 동물을 죽여서 도축하고 그 존재를 없어기.
  2. 언어: 조각낸 동물의 시체를 ‘고기’라고 부르기.
  3. 은유: “고깃조각이 된 느낌이었어요”처럼 살아있는 인간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은유로 사용하면서, 동물의 죽음이라는 원래의 경험이 가려짐.

지시자reference와 지시대상referent

언어학에서 지시자reference는 어떤 개념을 지칭하는 언어나 기호를 말하고, 지시대상referent이란 지시자에 의해 지시되는 개념 그 자체를 말한다. 예를 들어 ‘개미’와 ‘ant’는 모두 특정한 곤충을 지시하는 지시자이며, 지시자에 의해 지시되는 곤충이 지시대상이다.

여성억압과 동물억압의 교차성

부재 지시대상의 메커니즘 중 하나인 ‘은유’는 여성과 동물에 대한 교차적 억압을 이해하고자 할 때 특히 중요하다.

여성억압과 동물억압은 부재 지시대상 구조 하에서 서로 교차한다.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그리고 실제 성폭력)는 동물의 도축과 육식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의존한다. “Female Sexual Slavery”의 Kathy Barry는 매일 밤 6-7명의 소녀가 80-120명의 손님을 “서빙”하는 “도축장”이라는 이름의 성판매 업소를 언급한다. 이와 유사하게, 포르노그래피의 본디지 장비인 사슬, 개목걸이, 밧줄 등은 동물에 대한 통제를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동물에 대한 도축에 있어서는 여성이 부재 지시대상이며, 여성의 경험이 은유로 활용된다. 유혹하는 돼지의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지만 상상가능한 “매혹적이고 싱싱한 여성”에 의존한다.

성차별과 종차별 문제에 있어서, 여성과 동물은 각자 부재 지시대상이 되어 한쪽이 다른 한쪽의 억압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쓰이곤 한다(‘여성 도축’, ‘동물 강간’). 하지만 부재 지시대상은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교차적 관계를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육식주의가부장제폭력적 지배 이데올로기는 스스로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감춰 왔다. 부재 지시대상 구조는 폭력적 지대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 중 하나다.

은유의 위험성

한 주체의 억압 경험을 은유적 수단으로 사용할때, 수단으로 쓰인 주체의 경험이 감춰질 위험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마치 고깃조각이 된 느낌이었어요” 같은 표현은 살아있는 인간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은유로 죽은 동물의 시체인 ‘고깃조각’을 사용하면서, 동물의 죽음이라는 원래의 경험을 가려버리게 된다. 반대로, “동물에 대한 강간”이라는 표현은, 실제로 동물이 겪는 억압 경험이 강간이 맞다고 하더라도, 인간 여성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겪는 강간의 경험 및 온갖 2차 피해를 가려버릴 위험이 있다.

은유의 대상이 살아있는 주체가 아닌 국가나 환경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여성이 겪는 폭력 경험의 선명한 이미지를 국가나 환경이나 동물 등 다른 대상에 대한 폭력을 표현하기 위한 은유로 사용되곤 한다. “환경에 대한 유린”, “한국이 미국에 몸을 대준다(2019년 한 진보정당의 논평)” 등의 표현들이 그렇다.

참고로 2019년 연구에 따르면 공장식 축산을 강간이나 노예제도에 비유하거나, 여성에 대한 성애화된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식은 효과적이지도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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